그동안 고마웠고 행복했어요. 그리고 감사합니다!

26-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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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9월 20일 새벽 4시, 깊은 잠 속에서 전화벨 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새벽에 울리는 전화는 언제나 불길한 예감을 안고 온다. 그 시간에 걸려오는 전화가 좋은 소식을 전할 리 없다는 사실은 내 본능이 알고 있었다. 전화를 건 이는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된 어머니를 돌보는 양로원 원장님이었다.

    "할머니께서 운명하셨습니다. 빨리 오셔서 후사 처리를 부탁드립니다."

    그 말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가슴이 칼로 베인 듯 아팠다. 눈물이 쏟아졌다. 마지막 순간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온몸을 짓눌렀으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마음속에 넘쳐흘렀다. 하지만 슬픔에 잠겨 있을 수 만은 없었다. 어머니의 마지막 길을 지켜야 했다. 잠든 아내를 깨워 함께 양로원으로 향했다. 

     운전대를 잡으면서 어머니의 온기를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을까, 마지막 순간만이라도 곁에 있어 드릴 수 있기를 바라며 마음이 급해졌다.

    2022년 4월, 나는 한국 회사의 중국 사업부 설립을 위한 지점장으로 발령받았다. 아내는 한국에 남고, 나는 홀로 중국으로 떠났다. 广州와 深圳을 오가며 지사 설립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지만, 결국 山东青岛에서 파트너사와 합작해 업무를 시작하기로 결정하고 城阳에 숙소를 잡았다. 하지만 코로나19의 여파는 내 계획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사업은 난항을 겪었고, 그해 10월에는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어머니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었다. 팬데믹으로 간병인을 구하는 것은 물론, 어머니를 돌볼 사람도 없었다. 고향에 있는 누나는 위챗으로 거의 매일 앓고 계신 어머니의 영상과 사진을 보내왔고,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마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답답함은 깊어졌다.

    그러던 중, 회사 경영지원부 박과장에게서 "지점장님, 내년 예산에서 중국 사업부가 빠졌습니다…" 라는 카톡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는 중국 사업부가 철수 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업이 난항을 겪는 것도 모자라 직장마저 위태로워지니 불안감은 더해졌다.

    그때 아직 한국에 남아 있는 아내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아내는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 혼자 고민할 일이 아니예요. 어머니를 돌보는 건 자식으로서 당연한 도리잖아요. 지금 상황에서는 회사에 사표를 내고 어머니를 돌보는 게 맞아요. 우리 함께 가요." 아내의 말은 결단을 깨웠다. 아내는 언제나 나를 걱정하며 힘이 되어 주었다.

    결국 그해 2022년 11월 말, 나는 한국에 재입국 하고 회사를 직접 찾아가 사표를 제출했다. 회사에서 잘리기 전에 먼저 사표를 내는 셈이었다. 한국에 살던 집도 정리하고, 차도 처분했다. 대부분 집기와 살림살이는 "당근마켓"에 올려 팔 건 팔고, 나눌 건 나누며 아내와 함께 중국으로 떠날 준비를 마쳤다.

    12월 18일, 중국 입국 후 코로나 7일 격리가 끝나자마자, 어머니가 계신 吉林省汪清县으로 가기 위해 다시 青岛城阳에 살던 집을 정리하고, 남은 짐을 차에 싣고 아내와 함께 2,000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장거리 운전을 시작했다. 길은 멀고 험했지만, 어머니를 향한 마음이 나를 이끌었다.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머니는 1946년 4월 2일 吉林省汪清县百草沟棉田村水北(지금의 满天星자리)에서 7남매 중 넷째 딸로 태어났다. 큰 시내로 시집을 가겠다는 뚝심을 가지고, 문화대혁명이 한창일 때 가정 정치배경이 좋지 않은 중농 집안의 맏며느리로 시집왔다. 시집에는 시아버지와 두 시어머니가 계셨고, 아직 학생인 두 명의 도련님이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당시 중국 전역이 양식난에 허덕였고, 많은 가정에서 콩깍지 죽을 쒀서 연명하는 힘든 시기를 겪었다. 그 어려운 시기에 어머니는 1969년과 1971년에 각각 누나와 나를 연년생으로 출산하며 가정을 이끌었다.

    시아버지와 두 시어머니를 모시며 살면서 도련님들을 장가보내고, 여러 차례 分家와 合家를 반복했다. 내가 7살이 되던 해, 생산 대대에서 집을 지어주면서 작은 시어머니와 함께 다섯 식구가 따로 分家하게 되었고, 그 이후에도 어머니는 끊임없는 고난 속에서도 가정을 일구며 맏며느리이자 아내, 두 자식을 둔 엄마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 사이 여러 사연들이 많이 쌓였지만, 어머니는 꿋꿋이 잘 버텨 내셨고 해마다 현에서 내어주는 “五好家庭”이라는 표창장과 “十大书香家庭”이라는 연변주 부녀협회 칭호와 2009년 길림성 문화청에서 발급하는 朝鲜族打糕制作技艺“省级非物质文化遗产”라는 칭호도 수여받았다. 또 어머니의 헌신 덕분에 우리 오누이는 잘 자라났고, 각자 시집장가 가서 독립하였고 지금은 50대 나이에 접어들었다.

    어머니의 삶을 떠올리면 그리움과 고마움이 밀려온다. 힘든 시기에도 아낌없이 우리를 사랑으로 감싸주셨던 어머니는 언제나 나에게 큰 힘이 되어 주셨다. 그 따뜻한 품과 미소는 나를 지탱해 주는 원천이었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밑바탕이었다. 병상에서 고통받고 계신 어머니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 마음이 아프고, 고마움과 그리움, 안타까움이 뒤섞여 어머니께 충분한 보살핌과 사랑을 드리지 못하고 팬데믹으로 인해 치료에 집중하지 못한 자신에 후회가 깊어졌다. 

    장거리 운전 중에도 어머니 생각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내가 눈치채지 않도록 재빨리 손등으로 훔치며,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그렇게 우리는 도중에 휴게소에 잠시 들러 쉬어 가며, 장장 32시간을 달려 마침내 어머니 곁에 도착했다. 긴 여정 끝에 어머니가 계신 곳에 닿았을 때, 마음은 무겁고 아팠지만, 어머니를 다시 뵐 수 있다는 안도감도 함께 밀려왔다.

    누나와 매형은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의 간병에 이어, 중풍으로 고생하시는 어머니까지 묵묵히 돌봐왔다. 그 힘겨운 세월을 온몸으로 버티면서도 피곤한 얼굴로 우리를 맞아주는 훌쩍 늙어진 누나와 매형을 보니 미안함과 고마움이 가슴을 짓눌렀다. 멀리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누나와 매형에게 모든 짐을 떠넘겼다는 죄책감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아내와 함께 어머니를 간병하는 사이, 중국 내 방역 정책이 갑자기 완화되면서 팬데믹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주변에서 코로나19 전파가 빠르게 퍼졌고, 병문안을 오시던 이모님들을 비롯해 누나와 매형, 심지어 아내까지 모두 코로나에 감염되고 말았다. 아내는 증상이 더 심해지기 전에 天津으로 돌려보냈고, 누나는 매형과 함께 자택에서 자가 치료를 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행히 나와 어머니만은 감염되지 않았지만, 결국 병상에 계시는 어머니에게도 전파 될가봐  어머니와 나는 따로 독집에 문을 닫아 걸고 남게 되었고, 내가 직접 어머니를 간호하게 되었다.

    혼자서 어머니를 간병하는 생활은 고립된 느낌을 주었고, 주변의 걱정스러운 소식들로 인해 마음이 점점 더 답답해졌다. 어머니의 고통을 덜어드리기 위해 어머니에 많은 이야기도 들려주면서 최선을 다했지만, 외부와의 단절 속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슬픔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찾거나, 오랜만에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달면서, 그 사이 축적해 놓은 음식으로 간단한 요리를 해가며 힘든 나날들을 버텼다.

    그렇게 팬데믹은 몇 달 만에 끝났다. 

    아내와 대화하는 중, 내가 먼저 말했다.
    "여보, 우리 이렇게 계속 살 수는 없잖아요. 어머니를 양로원에 모시고, 우리는 각자 일도 하면서 어머니를 돌보는 게 어떨까요? 아직도 돈을 벌어야 하고, 우리도 일을 해야 하잖아요."
    "어머니를 공기 좋고 경치 좋은 威海에로 모셔가면 좋겠어요. 거기에 사업 아이템도 있고 또 그렇게 하면 우리는 일하면서도 어머니를 잘 보살필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 딸도 있고, 이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요. 어머니와 우리 모두를 위해서라도 이 방법이 최선인 것 같아요."

    그 후, 나는 아내가 天津으로 돌아가 있는 동안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고, 누나와 매형, 이모님들과도 의논한 끝에 날짜를 잡아 어머니를 山东威海로 모셔 가기로 결정했다.

    어머니는 중풍으로 오른쪽 반신마비와 언어장애를 겪고 계셨다. 그런 상황에서 어머니의 식사는 내가 직접 떠먹여 드려야 했고, 평소에는 기저귀를 착용하고 누워만 계셨다. 대중교통을 이용할수 없어 또 장거리 자가 운전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장장 2,000여 킬로미터를 달려야 했다. 승용차의 뒷좌석은 인터넷에서 구매한 침구용품으로 리모델링하여 간이 침대로 꾸며놓았다. 떠나는 날, 어머니의 동네 친구들이 눈물을 흘리며 배웅해 주셨고, 그 모습이 내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나는 중간중간 휴게소에 들러 어머니의 기저귀를 갈고 씻어드리며 威海로 향했다.

   먼저 威海에 도착한 아내는 셋방을 구하였고 나는 셋방 위치와 가까운 곳에 있는 "조선족 양로원"에 미리 예약을 하였고 도착하면서 바로 어머니를 거기에 모셨다. 양로원은 한국의 요양원과 비슷한 곳이였는데, 威海의 어느 고마운 조선족 교회에서 직영하는 곳으로, 원장님은 조선족 분이었고 간병인들은 모두 현지 한족분들이었다. 이분들은 엄청 다정다감하고 친절하여서 안심하고 어머니를 믿고 보살펴 달라고 부탁할 수 있었다. 입원 하는 당일 양로원에 이미 거주 하시는 거동이 괜찮으신 조선족 할머니들이 찾아오셔서 따뜻하게 반겨주었다.

    양로원에 어머니를 모신 후, 나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이 사업은 낚시용품 해외 직구 쇼핑몰 운영이였는데 이전에 하던 업종과 비슷한 곳이 많아 접근은 쉬웠지만, 물은 깊었다. 경쟁이 치열하고 소비자의 수요를 파악하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또한 홀로서기로 집에서부터 시작해야 했기 때문에 신경 쓸 일이 많았다. 물건을 고르고, 가격을 비교하고, 제품소개 상세페이지와 영상을 내가 직접 디자인 해서 업로드하고 배송 문제까지 챙겨야 했다. 처음에는 막막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분야인 낚시와 관련된 일이었기에 점차 흥미가 생겼다.

    매일매일을 충실하게 일하다 보니 주말은 어느새 다가왔고, 그 주말마다 아내와 함께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것이 일상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매번 주말 양로원을 방문할 때마다 어머니의 안부를 확인하고 필요한 것들을 챙겨 드리며 시간을 보냈다. 또한 아내와 함께 어머니를 모시는 일도 더할 나위 없이 보람 있었다. 우리는 어머니를 위해 작은 선물도 준비하고, 손수 만든 음식을 가져가 어머니가 드실수 있게 잘게 짜르거나 믹서기에 갈아 숟가락으로 입에 떠 드리며 함께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병환 언어장애로 말씀을 못하시는 어머니의 환한 미소가 그 무엇보다 큰 힘이 되었다.

    나의 사업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지만 쉽지는 않았다. 새로운 일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씩 사라지고, 어머니를 잘 돌보며 안정적인 수익을 내는 것이 내 목표가 되었다. 그렇게 각자의 일에 충실하면서도 가족의 소중함을 잊지 않으며 살아가는 우리 내외의 모습은 어느새 새로운 일상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나름 고요한 호수같이 평온하게 지내오던 일상 속에 걸려 온 새벽 전화는 큰 파장을 이르키며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양로원에 도착했을 때,  원장님과 직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직원의 안내를 받으면서 양로원 특별실에 가서 조용히 누워 계시는 어머니의 손을 잡았을 때, 아직도 따뜻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미 우리 곁을 떠나셨다.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어머니가 병상에서의 고통과 외로움이 떠올라 가슴이 미어졌다. 

    "누나, 오늘 아침 어머니가 우리 곁을 떠났어. 매형과 이모님들에게도 전해줘. 어머니는 이제 아프지 않은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야." 누나에게 메시지로 소식을 전했다.

    나는 아직도 따뜻한 어머니의 손을 잡고, 마음 깊숙이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엄마,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함께 있던 동안 너무 행복했고 감사했습니다. 어머니 잘 가세요."

    그 마지막 인사는 무거운 침묵 속에서 가슴에 새겨졌다. 어머니와의 기억이 밀려들며, 그간의 시간들이 눈물 속에서 떠올랐다. 내가 어렵고 힘들때 부모님만 원망했던 시절, 내가 아버지가 되고나서 부모 된 심정을 알게 된 일들, 그리고 어머니를 홀로 간병하던 시간들도, 어머니와의 마지막 인사도 전부 가슴에 깊이 남았다. 어머니가 병환으로 고통스러워하시면서 하루 빨리 완치되어 건강해져서 다시 일어나고 싶어 하시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 고통에서 벗어나셨을 거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나는 아내와 함께 그동안의 힘겨운 순간들을 되짚었다. 내가 홀로 어머니를 돌보던 시간, 어머니의 미소 하나가 나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또 어머니를 지켜드리지 못한 순간이 아쉬웠지만, 이제 어머니는 더 이상 고통 없이 평온한 곳에 계실 거라 믿었다. 이제 나는 어머니의 사랑과 헌신을 기억하며, 남은 인생을 가족을 지키고 돌보는 데에 충실할 것이다.

    "엄마, 사랑해요. 그동안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이제 우리 다시 만나요."

2024.10.08

원본글 : https://wulinamu.com/wlnm/39902/

#엄마#고마움#다시만나요